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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 ‘너’를 이용하여 ‘나’를 탈출하려는 이들의 지옥도 - 영화 <원정빌라>202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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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이용하여 ‘나’를 탈출하려는 이들의 지옥도 - 영화 <원정빌라>
송아름(영화평론가)
*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정(遠征)은 이동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싸우기 위해서든,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든, 연구를 위해서든 ‘원정’을 계획한다면 지금 있던 곳에서는 벗어나야 어디론가 옮겨야 한다. 영화 <원정빌라>의 제목은 그래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단단하게 고정되어있는 빌라라는 거주 공간, 그 앞의 붙은 ‘원정’은 끊임없이 움직이려는 무언가, 그러니까 무엇인가에서 떠나려는 이들이 모여드는 공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그들을 ‘원정’하게 했는가? 라는 질문이 유효할 수 있다. 영화 <원정빌라>는 부산이라는 낯선 곳으로 ‘원정’오는 단출한 주현(이현우)의 가족들을 중심에 두고 지금에서 벗어나려는 이들과 이를 이용하려는 또 다른 이들의 역학을 가감 없이 그려낸다.
영화는 불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철창을 앞에 두고 절규하는 이들의 모습은 평화롭게 주현이 부산의 원정빌라로 이사를 오는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혼란 속에 놓일 뜻밖의 경로들을 상상하게 한다. 주현은 아픈 어머니와 조카를 데리고 낯선 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이웃 신혜(문정희)를 만나 자주 충돌한다. 주현은 동네에서 나눠주던 사이비 종교 포교용 전단지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오다 큰 악의 없이 신혜의 집 우편함에 전단지를 끼워 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태도가 변한 신혜를 마주한다. 처음 신혜와 목사(정민성)의 등장을 꺼리던 빌라 사람들은 조금씩 두 사람의 친절에 교회에 발을 들이며 자신들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엄마까지 교회를 다니게 되자 주현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원정빌라>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오래도록 평화롭게 살길 바라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이 빌라가 곧 재개발로 큰 이익을 줄 것이라는 기대 속에 살고 있다. 주현이 부산이라는 먼 곳으로, 그리고 원정빌라를 선택하여 이동한 이유도 재개발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아픈 어머니와 조카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주현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부동산 투자, 즉 한 번에 큰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을 쥐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혜가 빠진 교회의 목사는 모두에게 바로 이 빌라의 재개발을 위해 기도하겠다며 조금씩 파고들기 시작했다. 재개발 외의 관심, 그러니까 이성에게 관심이 큰 이에게는 그것을, 학업이나 취업에 관심이 있는 이에게는 또 그에 걸맞은 사탕을 내밀면서 신혜와 목사는 점차 사람들에게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꾀어내고 있었다.
종교라는 이름을 달고 누군가의 사익(私益)을 위한 기도를 올리겠다는 것은 분명 그 본질을 의심할 만한 것이었지만 지금이 만족스럽지 않은 이들에게 이러한 오류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접근’에서 ‘종속’에 이르기까지 단계별로 사람들이 목사의 말에 빠져드는 모습은 그들의 돈과 집, 그리고 각자의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아니 광기에 가까운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영화는 주현의 얼굴을 중심으로 그를 질책하는 이들 사이에서 느낄 혼란, 그리고 괴로움 등을 역동감 넘치는 카메라 워킹으로 시각화한다. 무질서한 사람들의 힐난은 곧 그들과 섞이지 않으려는 이들의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점차 영화의 첫 장면, 바로 그 파국으로 다가간다.
목사는 원정빌라의 사람들을 이 땅의 주인으로 만드는 의식을 치르자며 지하로 사람들을 모은다. 그리고 사람들이 헌금함에 하나씩 등기권리증을 꽂고 목사를 기다리는 모습에서 목사의 본의가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자신들을 지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줄 재개발의 가능성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또 다른 가능성 앞에 헌납할 수 있는 하찮은 물건 정도가 되어 있었다. 이 모든 일에 빌라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신혜 역시 아들을 살리겠다는 자신의 바람이 불러들인 끔찍한 결과와 마주해야 했다. 그들이 바라마지 않던 지금보다 나은 내일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가능성에 베팅하거나 누군가를 착취하고 깎아가며 만드는 것이었고 이들 앞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결과를 마주하는 길만이 놓여 있었다.
영화 <원정빌라>가 던진 질문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이었지만 여러 레퍼런스를 통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흐름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듯 갑작스레 나타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유진(방민아)의 역할이나 지하실 의식에 너무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방법이나 이를 활용하지 않는 탈출 등과 같이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는 부분이 남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불안한 구조에도 <원정빌라>의 절박함이 읽히는 것은 영화가 모든 착취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남으로부터 찾겠다는 잔인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신랄하게 짚었기 때문일 것이다. 목사는 자신의 딸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고자 했고, 신혜는 빌라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아들을 살리려 했다. 또 원정빌라의 많은 이들은 불로소득에 기대며 이를 방해하는 그 무엇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원정빌라의 재개발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에 기뻐하는 빌라 사람들의 춤사위가 섬뜩해 보이는 것은 <원정빌라>가 보여준 착취의 굴레가 얼마나 잔인한지를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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