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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진의 얼굴 : <어른들은 몰라요>2021-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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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의 얼굴 : <어른들은 몰라요>
이광호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나는 개별 영화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 우리가 습관적으로 내뱉는 대로, '한 편의' 영화에 대해 말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그것이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그런 '한 편'으로 완결되며 파고들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자꾸만 다른 영화, 혹은 그 영화가 놓인 환경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환 감독의 <어른들은 몰라요>를 보면서, 그리고 보고 난 지금도 여전히 아른거리는 첫인상이다.
거리를 떠도는 10대 청소년이 주인공인 <어른들은 몰라요>(2021)는 사실 몇 년 간 만들어진 한국독립영화들을 지켜본 관객들에게, 어쩌면 그 소재만으로도 소위 '방황하는 청소년'으로 대표될 만한 윤성현의 <파수꾼>(2011)이나, 상당히 강도 높은 폭력을 무람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양익준의 <똥파리>(2009)가 떠오르는 것은 아주 진솔한 반응일 것이다. 다만 이런 인상을 빌미로 다른 영화들을 빌려와 차이를 비교하며,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독립영화의 경향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여전히 조심스럽다고 느낀다.
<어른들은 몰라요>를 보면서 개봉 이후 독립영화의 문제작으로 여겨졌던 이환 감독의 장편데뷔작 <박화영>(2018)을 떠올리지 않기란 어렵다. 명백히 다른 제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몰라요>는 '박화영2'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 세진(이유미)이 <박화영>에서 같은 이름을 걸고 다시 '거리의 아이'로 출연한다는 내러티브 속 명료한 사실 때문이라기보다는,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어른들은 몰라요>를 이루고 있는 전반적인 고강도 수위의 연출과 이야기의 전개 흐름이 <박화영>과 거의 동일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10대 청소년들의 가래침과 흡연, 폭행과 욕설로 영화의 모든 부분을 '무장'했다고 불러도 좋을 <박화영>은 관객 저마다의 호불호에 관계없이, 시청각적 자극의 불쾌감을 말하는 데 있어서라면 떼 놓을 수 없는 필수 요소로 위치시키며, 여전히 이는 <어른들은 몰라요>를 이루는 중추다.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라는 <박화영>의 유명한 대사처럼, 이환의 두 장편영화는 모두 "본다"는 것으로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른들은 몰라요>에 전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폭력과 관련된 호불호의 주장을 하거나, 거리를 활보하는 아이들의 삶을 얼마나 냉정한 '리얼리즘'으로 표현했는지에 대해 말을 붙이는 것보다는 다른 쪽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 <박화영>의 강력한 자장으로부터 <어른들은 몰라요>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라는 생각도 든다.
일단 시청각적인 충격을 덜어내고 나면, <어른들은 몰라요>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머릿속에 각인되는 것은 다름 아닌 세진의 표정일 것이다. 세진과 함께하는 다른 인물들이 비교적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치는 것에 비해 세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다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감정적으로 큰 동요가 있는 몇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 전반에서 세진은 시종일관 웃는 표정과 커다란 눈을 고수한다. 언뜻 그것은 이 영화의 제목대로 무책임한 어른들과 그 사회의 눈치를 보기 위해 스스로 고안한 전략적 가면으로 보인다. 혹은 단순한 '웃음 뒤의 슬픔'이나 끔찍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긍정을 잃지 않으려는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별다른 위험이 없을 때에도 세진이 웃음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점은 이상하다. 세진이 우연히 만나 4인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주영(안희연), 재필(이환), 신지(한성수) 앞에서 이 같은 표정을 고수하는 것은 잠재적인 위협을 고려한 대비책이라고 해도, 가족인 동생 세정(신햇빛)에게도 이러한 표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좀처럼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게다가 세진의 이 얼굴은 세진의 말과 행동에 동기화되는 수준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순진무구하다는 인상을 강화하며 급기야 마리오네트화 하기에 이른다.
세진의 수세적인 초상은 후반부 재필의 과격한 폭행으로 무너져 내린다. 영화 안에서 가장 극단적이라고 해도 좋을 이 시퀀스에서 재필은 세진의 얼굴을 가격하고, 주영은 그런 재필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안간힘을 다한다. 이때 재필 역시 노래방을 운영하는 준석(허준석)에게 폭행을 당해 얼굴에 상처를 가득 안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런저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이 공동체가 나름 신뢰로 유지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세진에 대한 재필의 폭력은 그 개연성에 있어 좀처럼 납득하기 힘든 우발적 흐름이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인물의 얼굴에 집중한다면 여기에는 작은 규칙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편한 순간들이 많지만 의외로 <어른들은 몰라요>에서 특기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물리적 폭행으로 인한 시각적인 상처가 좀처럼 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교 폭력을 당할 때에도 얼굴은 보존되며, 유산을 목적으로 하는 도착적 요청에도 세진은 배에 타격을 당할 뿐이다. 사실 영화 전반에서 세진 일행이 마주하는 폭력의 대부분은 그들을 보듬어주지 못하는 사회라는, 비가시적이고 추상적이며 구조적인 압박에 가깝다. 시청각적 폭력은 유보되며 동시에 주인공 일행의 얼굴 또한 보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준석이 재필의 얼굴에 무참히 폭력을 가하자, 이는 우회 없이 곧장 세진에게 이어진다. 이 얼굴의 훼손이라는 상황은 이내 파국이 되고 공동체를 붕괴시킨다. 요컨대 '파괴된 얼굴'이라고 불러도 좋을 모종의 시각적 양식이 <어른들은 몰라요>를 작동하는 역학인 것이다.
주영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혼자가 된 세진은 청소년 쉼터의 보호를 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연결은 다소 느닷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어른들은 몰라요>는 어른으로 대표되는 사회가 결코 거리의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 하는 한국 사회에 기반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여태껏 우리가 보았던 것은 그들이 세상 속에 편입되지 못하고, 절도와 침투로 삶을 연명하는 아이들이 아니었는가.
이야기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보이던, 비좁고 숨 막히는 정조를 전달했던 골목들, 거주지 없이 거리를 방황하거나 임시적 장소를 찾아 쪽잠을 자던 행위들, 어두운 도시의 밤을 배경으로 아이들이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저항의 기운을 뿜던 대비적 미장센, 영화 전체를 장식하던 아이들의 거친 말과 행동은 일거에 제거된다. 이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밝은 대낮과 평온한 일상의 소리, 안락한 공간과 휴식 시간, 무엇보다 어른들의 환대이다. 심지어 재필에게 그 같은 폭행을 겪었음에도, 세진의 아기가 건강하다고 말하는 의사의 진단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매 순간마다 근심을 멈출 수 없었던 앞선 장면들과 정반대로 평온한 리듬을 회복하는 이 낙차는 당황스럽기 그지없는데, 바로 이 납득하기 어려운 분위기 전환 때문에라도 우리는 <어른들은 몰라요>가 품고 있는 규칙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어른들' 중 그 누구도 구체적인 인물로 소개되지 않지만, 반대로 '아이들'은 각자 개성을 품은 단독자로 놓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진을 보살펴주는 부부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들과 세진이 진중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확인하지 못 한다. 세진이 집안을 둘러보며 십자가 등으로 그들의 생활 내력을 짐작하듯, 관객인 우리 또한 다분히 어렴풋한 방식으로 부부라는 캐릭터를 소개받는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은 몰라요>가 유지하는 규칙 중 하나는 '어른들과 아이들'이라는 동등한 규모의 공동체란 상생할 수 없으며, '어른들과 아이'라는 불균형한 지대에서만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파국적 입장을 고수한다.
또 하나 달라진 점은 세진의 얼굴이 망가졌다는 것이다. 청소년 상담 센터의 아진(류아벨)은 "예쁜 얼굴에 큰일인" 상처를 안쓰럽게 여기고, 자신과 세진의 팔 모두에 새겨진 자해의 흔적을 공유하며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하지만 이러한 환대를 발생하는 동기가 훼손된 신체이며, 눈에 보임으로써 자신의 상황을 증명해야 한다는 점은 <어른들은 몰라요>가 품은 아주 냉혹한 조건이기도 하다. 세진은 입술의 상처로 컵라면조차 쉽게 넘기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나서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평화 속의 불안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일상의 끝에서, 세진은 갑작스런 통증으로 중절수술을 받는다. 세진의 다리로 흘러내리는 피, 수술실 내부의 로우 키 조명, 조금만 늦었더라면 세진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의사의 근심 어린 말, 그리고 세진의 보호자들이 멍한 상태로 앉아 있는 풀 숏까지... 영화는 섬뜩한 묘사를 차례차례 나열하며, 임신중절에 순진무구하게 접근해 온 세진에 믿음을 주기보다는 리얼리티의 냉혹함으로 거리 두기를 선택한다. 세진이 이 가혹함을 모두 견뎌내고 나서야 <어른들은 몰라요>는 마지막 장면에 이른다. 영화의 첫 숏, 답답한 실내와 어둠 속에서 얼굴을 보이지 않던 세진은 영화의 마지막 숏에서 자신의 무표정을 무람없이 드러낸다. 그곳에는 어떠한 가식도, 허위도, 비밀도 없다. 시종 귀여움을 장착한 마리오네트 같았던 세진은 얼굴의 파괴라는 과격한 의식을 거쳐 비로소 무표정을 회복한다. 그런데 보드를 타던 세진이 스쳐가고는 했던 길 위의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강변을 거니는 세진은 대체 어디를 보는 것일까. 대체 수술 이후 얼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인위적인 표정과 큰 눈으로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던 세진의 명료함은 이곳에 없으며, 동생 세정과 주영의 근황 또한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음으로서 무엇이든 지시할 수 있다는 무표정의 통상적인 특징 대신, 세진의 무표정은 또 다른 불안을 암시하는 것 같다.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 도입부, 가시적인 방식으로 아이들의 불우한 생활상을 선명하게 전달하던 <어른들은 몰라요>의 엔딩은 언뜻 뮤직비디오와 같은 외연적 청량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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