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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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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영화의 봄 <수면병>2019-02-13
Review 2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독일 영화의 봄 Focus on the Contemporary German Cinema 2019. 2.1.(금) - 2.28.(목)

 

닮은 듯 다른 듯

<수면병> (울리히 쾰러, 2011)

 

이광호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수면병>에 대한 개략적인 줄거리를 듣고 나서 (그에 매몰된 채로) 관람하게 되면 난감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상으로 이 영화는 아프리카 원조 정책에 대한 민낯, 혹은 제3세계에 대한 21세기적 제국주의를 들추는 정치적, 사회적인 비판극으로 읽힐 구석이 있으며 그것이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아 보인다. 그런데 그와 같은 시선에서 본다면, 주인공 일행이 야간사냥을 떠나는 <수면병>의 후반부와 하마가 등장하는 다소 뜬금없는 엔딩에 대해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 그 경우 관객은 곧잘 미아가 되거나 변명 섞인 영화 읽기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가령 <수면병>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어둠의 이미지로부터 기껏해야 '아프리카 원조의 무력함과 답답함'을 말하고, 후반부를 가득 채운 정글이라는 공간에서 '계산적 부패에 대응하는 자연의 매서움'과 같은 수사적 표현 정도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수면병>에 대한 피상적이고 반쪽짜리 진단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영화가 취한 정치적인 담론이나 문제를 영화읽기의 핵심으로 두고 모든 이미지가 그를 쫓아오는 도구로만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면병>의 외형에 대해 조금 더 말해보고자 한다. 형식상 <수면병>의 가장 큰 특징은 영화가 '3년 후'라는 시간을 기준으로 삼은 다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는 지점에 있다. 그런데 이 분절은 조금 이상하다. 편의상 나누게 되지만, 1부와 2부라는 다분히 단선적이고 인과적인 관계로 보기에 두 덩어리는 대단히 느슨하게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1부는 독일의사 에보를 중심으로, 2부는 흑인의사 알렉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1부의 끝과 2부의 시작은 마치 짝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다른 분위기로 표현된다. 구체적으로 이렇다. 가족들이 떠난 뒤 홀로 남은 에보는 어두운 밤, 집에서 전화통화를 하고 1부가 끝난다. 화면이 암전된 다음 드러나는 2부의 첫 쇼트는, 발표를 듣는 사람들로 빼곡한 세미나실이며 이곳은 아프리카가 아닌 프랑스의 파리다. 1인과 다수,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아프리카와 유럽, 밤과 낮처럼 두 장면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의 대조적 낙차 감각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2부가 시작하면 1부의 정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 같고 알렉스가 서사의 중심축이 되면서 그러한 느낌은 더욱 배가된다. 이후 알렉스가 수면병 평가를 위해 에보가 있는 아프리카에 도착하기까지, 아니 그를 만나기 전까지 <수면병>은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마치 다른 영화를 보는듯한 감각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오묘한 두 세계의 징검다리가 되는 에보라는 인물이 중요하다. 구체적으로는 1부의 에보와 2부의 에보를 눈여겨보면, 그를 둘러싼 주변의 구성요소들은 너무나도 다르다. 1부의 에보는 독일의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그들은 모두 백인이다), 수영을 하거나 맛 좋은 저녁식사를 하는 등 여가를 누린다. 한편 2부의 에보는 현지의 어린 여성과 새 가정을 꾸리고 있으며(그들은 모두 흑인이다), 게으른 의료행위를 일삼고 있다. 1부에서 그는 당장이라도 카메룬을 떠나 독일로 돌아가려고 하며, 아내로 추정되는 상대방과 통화를 하며 눈물을 머금는다. 그런데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린 듯한 2부에서 그러한 모습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1부와 2부의 에보에게서 은근한 12역의 느낌을 받는 것은 과도하게 예민한 감상인 걸까.

 

    동일한 관점은 대조적인 방법(다인 1)으로 알렉스에게도 적용된다. 그는 유럽에서 왔지만 흑인이다. 아프리카 현지인들의 기표(피부색)를 갖춘 그가 어둠 속에서 헤드라이트를 달고 있을 때, 1부에서 에보의 집을 지키던 흑인 경호원의 이미지가 상상되는 것은 무리일까. 혹은 침대가 달랑 놓인 방에 누운 알렉스와 수면병 환자의 이미지는 유사하게 포개어지는 것을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부패에 참여하는 독일 출신 백인 에보가 은근히 알렉스를 무시하는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가 이러한 이미지적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비슷해 보이면서도 다른 것, 다르면서도 비슷해 보이는 것. 이것은 비단 <수면병>만의 독창적인 특징은 아니다. 데이비드 린치가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에서 같은 인물을 동원하지만 영화를 1부와 2부처럼 쪼개놓고 두 세계의 은근한 유사와 차이에서 혼란스럽게 만드는 방식은 현대 영화에서 종종 드러나는 특징이다(혹자는 이를 "21세기 영화"라 부른다). 이러한 방식의 운용에 있어 우리가 캐릭터라고 불러왔던 것은 영화 안과 바깥을 유랑하며 점차 그 성질을 달리하게 된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쿨, 리산드로 알론소, 구스 반 산트 등과 같은 작가들로 대표되는 이 서술법의 가까운 예시로는 홍상수가 있을 것이다. <옥희의 영화>(2010)의 에피소드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해진 캐릭터 없이 모호한 채로 세계를 오고 간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에서 함부르크와 강릉을 기준으로 나뉜 영화에는 모두 김민희라는 배우가 '영희'라는 이름으로 출현한다 (1부의 엔딩에서 마치 죽음을 연상시키는 영희의 퇴장은 2부의 존재를 기묘하게 만든다). <그 후>(2017)<풀잎들>(2018)에서 김민희의 육체로 등장하는 두 명의 '아름'은 서로의 세계에 흔적을 남기고 알게 모르게 교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하나의 육체가 두 가지 이상의 성격을 품고 있다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으며, 서사와 엮인 오브제의 정서 혹은 개념을 시각화 혹은 형식적 차원의 은유화와도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서사의 구성요소(인물)와 형식적 특징 중 어느 하나가 앞서나가거나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혼재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쪽에 가깝다. 과도한 상상을 부리자면, 숏과 숏이 겹쳐지는 전환 방식인 디졸브(Dissolve)의 감각이 캐릭터에 달라붙어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수면병>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영화라는 개념 자체의 가능성과 확장성을 탐구하는 실험적 시도들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기묘한 유사와 차이가 반복되다 영화의 엔딩에 이르면 압도적인 양의 어둠이 영화를 잠식한다. 멈추지 않고 들리는 풀벌레 소리와 정글의 이미지는 부패 개발의 대립항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의미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의 형상에 가깝다. 이 시퀀스에는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장면 하나가 있다. 알렉스가 홀로 남기로 하자, 일행은 일이 끝난 후 데리러 오겠다며 숲속으로 들어간다. 이어지는 쇼트에서 그들의 뒷모습이 보이고, 커트 없이 하나의 숏 안에서 정글의 풍경을 훑는 시선적 운동이 지속된다. 그런데 순간 화면에서 총성이 들리고 알렉스가 잠에서 깨는 행위가 곧바로 이어진다. 그는 꿈을 꾼 것일까. 언제 잠에 들었고 얼마나 꿈을 꾼 것일까. 시점 쇼트처럼 보였던 장면은 알렉스의 시선이 아니었던 것인가. 알렉스가 잠에서 깨고 난 뒤 가스파드와 에보의 행방은 묘연해져 있다. 그들은 나타나지 않고, 알렉스가 떠난 정글에 초반부 넌지시 언급되었던 하마가 실체를 갖추고 출현한다. 이곳에 나타난 하마는 무엇인가. 가스파드와 에보는 하마에게 잡아먹힌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하마가 되어버린 걸까. <수면병>의 엔딩은 영화 표면에 드러나 있던 정치적, 서사적 신호와 기호들을 삼켜버리고 그를 기이한 감각으로 되돌려주는, 다분히 현대적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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